(美術世界 2003. 9) 2003금강국제자연미술제

2013. 5. 4. 23:35blog/art+

2003-11-05 20:57:42

 

2003년 9월호 美術世界 what's up2
글_Dunpeel

 

 

 

자연을 지배하듯 휘감고, 대지위에 대못을 박은 듯 의미없이 우뚝 서있는 인공적인 상징물들을 자연을 위한 미술이라 말 할 수 있을까?
해맑은 소녀가 겨울에 나무가 추울까 걱정 되 뿌리위에 모닥불을 피워주는 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중분부터 시작된 대지미술에 자연은 있을지라도 사랑은 없다." 자연과 하나 되기 위해 사랑으로 다가가려 하지만 이미 인간은 멀어질 때로 멀어졌다.
자연도 거부한다. 다시 한번 자연과 대화를 하고 싶은데 자연은 그냥 이렇게 살다 사라지게 내버려두라 한다. 그래도 다행히 지치지 않고 묵묵히 자연과 대화하는 이들이 있다. 한국의 자연미술 연구모임 야투(野投)가 그러하다.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공원에선 야투(野投)의 「2003 금강국제자연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20년이 넘도록 자연공간 속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그들의 작업을 이제야 만나겠다고 찾아가니, 차편에 기댄 몸뚱이가 쉴새없이 불편하다. 멀리서 관심에만 만족했던 것이 죄였나 보다. '들에서 던지다'라는 뜻을 가진 한국자연미술가협회ꡐ야투ꡑ에 대한 정보는 꾸준하게 간간이 눈에 띄면서도 구체적인 자료를 접하기가 어려웠다. 1981년 도심의 화랑을 떠나 자연 속에 기거하면서부터 야투는 자연이외의 것에 등을 보인 채 그들만의 관심사를 연구해 나갔기 때문이다.
1995년 후원에 의한 전시도록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그들은 스스로 사진을 인화하고 자료를 정리하여 전시기록을 남겼다. 전시도록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국내에 애써 작업의 결과를 알리려 노력하진 않았다. 학벌로 평가되던 국내미술계를 경험했고, 자연 속에서의 기나긴 활동 중, 그들은 어느새 자연과 호흡하는 자연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시에 대해 친절히 안내해준 이응우 사무총장과의 대화 중 잠시나마 홍보의 중요성을 꺼내었던 스스로가 부끄럽다.

이번 '제7회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전'에는 국내작가 29명과 해외작가 18명이 참여하였다. 1991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예산문제와 해외에서의 자연미술초대전, 연구발표회 일정으로 인해 매년 치러지진 못했다. 처음 국제미술전이 시작되게 된 동기는 1989년 독일 함부르크에서의 초대전이었다. 1981년부터 준비한 자료를 독일에 출품하여 갖게 된 「자연미술전」에 대해 독일작가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중 현지 자연에서 작업을 해왔던 독일 작가들은 관심 이상의 직접적인 참여를 요구했다. 야투의 자연미술 작업은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움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기로 1991년 첫 번째 국제전을 갖게 되었고, 현재 국제자연미술전을 경험한 작가들의 입소문과 야투의 연구발표에 의해 해마다 수많은 해외 작가들의 자료가 야투의 사무실에 쌓여진다. 「국제자연미술전」은 작품을 현지에서 만들어와 설치하는 것이 아닌 전시가 열릴 자연을 배경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설치하기에 전시오픈 수개월 전에 작가들이 전시 장소에 모여 합숙을 시작한다. 낮에는 자연 속에서 각자의 작품을 구상하며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모여 낮에 생각한 자신의 계획을 발표하고 이에 대한 토론으로 밤을 지새운다. 야투는 20여 년 동안 연구한 '미술을 통한 자연과 환경 그리고 인간'이란 주제를 참여작가들에게 이해시키고, 참여작가들은 이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답을 찾아나가면서 ꡐ자연미술ꡑ이라는 독창적 미술이 자라나는 것이다.

「금강국제자연미술전」의 작품은 공주산성공원(공산성) 일대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워낙에 넓은 공원인지라 작품을 일일이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에 공원 약도에 작품 위치를 표시한 안내장이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자연의 재료로 자연을 해하지 않고 하나 되어 설치된 작품들이기에 웬만한 집중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작품을 옆에 놓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그러나 두 눈에 핏대를 세우고 발품을 팔며 공산성 공원을 헤매는 관람은 절대 추천하고 싶지 않다. 옷을 적실 듯 말 듯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이 같이 전시를 관람해 본 결과 그것은 최악의 관람방법이었다. 공원에 산책 나온 가족들이 우연히 작품을 보고 즐거워하며 대화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물어보니 어린 사내아이가 자랑하듯 "사람모양의 나무도 있고요, 예쁜 바위도 있고요, 사람얼굴가진 나무도 있고요…." 지금까지 공원에서 본 작품들을 쭉 말해 나가는 소년의 이야기 속에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모양의 나무'라 말한 작품은 처음 공원을 올라오는 길에 만난 기무라 가츠유키의 <허수아비>가 분명했다. '짚단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ꡑ이 아닌 ꡐ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자란 나무'로 소년은 보고 말한 것이다. 작품을 애써 찾고 분석적으로 바라보다보니 야투가 말하는 자연미술을 바르게 보지 못했다. 작품이 아닌 자연을 먼저 바라보았던 소년의 가족이야 말로 「금강국제자연미술전」의 알짜배기를 보았다 하겠다.

공산성 공원 곳곳에서 참여 작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시가 오픈 되고도 작가들은 전시장에 남아 스스로의 작품에 대한 대화가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다. 전시 작품의 설치가 모두 끝나고 작가들의 작품 설명 시간이 있었는데, 낮을 넘기어 밤엔 라이트를 비춰 가며까지 토론이 이어졌다고 한다. 작품 설명과 야투의 자연미술에 대한 내용은 전시 운영위원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20여 년간 연구한 그들의 자연미술을 어찌 몇 시간 만에 이해할 수 있으랴. 전시를 안내해 주는 작가는 다듬어진 인도를 벗어나 산길을 따라 이동했다. 왜 산길로만 다니나 궁금해 물으니 "몇 년간 공산성 공원속의 자연을 누비다 보니 산길이 편하다"라고 말한다. 갑자기 그가 기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전시작품을 보면서 그는 그들의 전시주제인 ꡐ미술을 통한 자연과 환경 그리고 인간ꡑ을 강조하였다. 단지 자연 속에 인위적인 조형물이 설치된 전시가 아닌 미술이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미술은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인위적인 요소이다. 자연과는 반대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에 자연과 미술의 하나 됨을 위해선 창조를 행하는 인간이 먼저 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최소한의 필요한 자연만을 보호해야 한다는 듯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의 인류가 있기까지 수백만 년간 헌신한 자연의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가소롭고 개탄할 일이다. 「2003 금강국제자연미술전」에 소개된 작품들은 자연 앞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다소 소극적인 모습이라 말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서 자연을 동경하는 참다운 인간의 모습 또한 볼 수 있었다. 인간이 있음으로 해서 자연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자연이 있음으로 해서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자연과 인간의 연결점을 미술을 통해 찾아가는 야투. 그들의 작업은 자연에 대해 읽어버린 소중한 마음을 모두가 되찾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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